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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0)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0)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입력 2011-08-15 00:00
업데이트 201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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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넘친 사생아, ‘영혼’ 그리며 神을 꿈 꾸다

“대자연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가장 위대한 재능의 비가 천상의 작용을 거쳐 사람들의 몸을 적시기도 하는데 가끔 단 한 사람만이 초자연적인 이유에서 이러한 아름다움, 우아함, 능력으로 흠뻑 젖기도 한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너무나도 신비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를 뒤따르면서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세계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신이 점지한 천재, 혹은 그 자신이 바로 신이란 것을 재삼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자신보다 한 세대 앞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를 “놀랍도록 신적인 사람”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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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과 더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암굴의 성모’. 어두컴컴한 동굴을 배경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 아기 예수를 삼각 구도로 배치시켰다. 전에  없던 화면 구성이다.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과 더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암굴의 성모’. 어두컴컴한 동굴을 배경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 아기 예수를 삼각 구도로 배치시켰다. 전에 없던 화면 구성이다.


레오나르도는 고상한 교양인 행세를 하면서도 이름 없는 풀을 스케치하려고 풀밭에 엎드리고, 30구가 넘는 시체를 해부했는가 하면, 낯선 풍경과 기괴한 얼굴을 찾아 시장을 누볐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하는 ‘천재’의 면모였다.

●“재주가 많으나 일 마무리 못짓는 사람”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조용한 시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17살에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이사한다. 15세기의 피렌체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불결하고 역겨운 과거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길을 닦고 성당을 지으며 우아한 문명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상업과 금융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독자적인 윤리를 만들어가며 변화를 주도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낡은 세계가 부서지고 인간의 손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신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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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추정되는 초상화. 이탈리아 남부 마을에서 2009년 역사학자가 발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추정되는 초상화. 이탈리아 남부 마을에서 2009년 역사학자가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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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책에 있는 인체 해부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책에 있는 인체 해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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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책에 있는 물에 관한 연구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책에 있는 물에 관한 연구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능력 있는 공증인으로서 피렌체의 변화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지 못한다.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사생아라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별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으나 새로 성장한 계급은 부정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집단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부친은 그를 당시 최고의 장인이었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공방에 보낸다. 베로키오는 청동 주물과 회화, 건축에서 인정받는 장인이자 ‘기술 개혁가’였다. 그의 공방은 최신 공법의 실험실이었으며, 정치 토론의 장이었고, 고대 철학을 비롯하여 음악과 문학을 즐기는 문화의 메카였다.

이런 지적 활기는 소년 레오나르도를 자극했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의 장인은 스스로 경험하고 탐구하여 새로운 것을 창안해야 한다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배웠다. 배움과 창조의 매력은 그를 사로잡았고, 더 많은 것을 알수록 앎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해갔다.

새로운 창작 의욕으로 가득 찬 재주 많은 젊은이 레오나르도. 하지만 스승에게서 독립한 이후 그는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전쟁에 시달리던 피렌체의 재정은 파탄나기 시작했고, 교황과의 갈등도 심해져 성당을 신축할 수도 없었으며, 흑사병의 창궐로 아름다운 도시는 혼돈의 장으로 변했다.

보티첼리, 페루지노, 피에로 디 코시모 등은 교황의 부름을 받아 신축 성당의 벽화 작업을 위해 로마로 떠나갔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명단에 없었고, 몇몇 작업을 의뢰 받았으나 작품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피렌체에서 그는 아직 “재주가 많으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장인에서 창조자로… 다빈치코드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길을 찾아 밀라노로 향한다. 밀라노에서 세력을 잡은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가 부친의 청동기마상을 제작하고 싶어한다는 정보를 알아낸 것. 레오나르도는 일 모로에게 보낸 ‘구직편지’에서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주 가볍고 튼튼한 다리’, ‘성을 무너뜨리는 기계’, ‘공포를 자아내는 여러 종류의 포’ 등 온갖 전쟁 기술을 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대리석이나 청동 또는 진흙으로 조각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

레오나르도의 예상은 적중했다. 밀라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에 위치한 군사와 상업의 요충지로, 격렬한 쟁탈전과 복구 작업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지배자 일 모로는 군사력을 기르는 한편 밀라노를 피렌체와 같은 문화 도시로 재정비하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각종 분야를 넘나드는 박학한 지식과 놀라운 언변, 우아한 태도로 일 모로를 사로잡았다.

일 모로의 후원 하에 그는 자동으로 연주되는 악기를 만들고 화려한 축제를 기획하는 한편, 햇빛이 잘 들고 굴뚝의 연기는 잘 빠져나가는 쾌적한 가옥을 설계했으며, 밀라노 외곽의 강물을 도심으로 연결하여 물레방아를 돌리고, 화초를 키우고 자동으로 거리를 세척하는 설비를 고안한다.

신이 창조한 자연이 고유한 법칙대로 작동하듯이, 그 역시 자신의 ‘창조’에 따라 작동하는 도시를 꿈꾸었던 것.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말 그대로 신에 필적하는 창조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700쪽에 이르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은 온갖 그림과 암호 같은 문자들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다빈치 코드, 즉 신비한 ‘비밀’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밀이나 암호보다는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한 백과사전의 초고와 같다.

회화에 필요한 원근법, 빛과 그림자의 원리, 색채론은 물론, 비행원리, 인체와 동식물에 관한 생물학적 연구, 예술가의 윤리적 지침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색까지, 그의 노트북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더듬는 화가의 잡담이 아니라 자연에 숨겨진 신의 창조 법칙을 알아내고자 하는 탐험가의 일지에 가깝다.

레오나르도의 왕성한 탐구욕은 회화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기존의 관습적 도상을 깨고 전에 없던 화면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암굴의 성모’에서는 옥좌에 앉은 성모가 아니라 어두운 동굴 안에서 사랑스러운 아들 예수가 가야 할 길을 안타까워하는 성모의 마음을, ‘최후의 만찬’에서는 고상한 성인들이 만찬이 아니라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너희들 중 나를 배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발언이 몰고 온 충격을 포착했다.

일 모로가 실각한 뒤에도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떠돌면서 자신의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를 우리는 ‘모나리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나리자’에는 윤곽을 명확하게 그리지 않고, 멀어질수록 대상을 뿌옇게 처리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사용되었다.

세밀하게 표현된 풍경은 안개가 쌓인 듯 흐려지면서 사실감을 더했고, 살짝 흐릿하게 표현된 그녀의 입술은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지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은 입술이 아니라 미소였고, 얼굴이 아니라 내면이었다. 대상을 재현하는 단순한 손 기술자를 넘어서 인간의 영혼을 눈앞에 되살려내는 창조자가 된 것이다.

“시인은 이야기나 글로 형태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지만, 화가는 얼굴 표정을 드러내는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인물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그릴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시인의 펜으로는 할 수 없지만, 화가의 붓을 통해서는 이룰 수 있는 일이다.”(다 빈치의 ‘노트북’)

●위대한 탐구자, 겸허한 연구가로

레오나르도의 완성작은 10점 남짓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는 그가 “그조차도 실현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미완성 상태가 더 예술적이기 때문에 일부러 완성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레오나르도 스스로가 완성하는 일보다는 착상하는 일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는 해석이다. 예술은 그에게 과학과 철학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꽃과 시체를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일은 생명의 원리를 파악하는 일이었으며, 대포를 고안하는 일은 물리법칙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설계였다. 그리고 그 모두는 자연의 섭리를 숙고하는 과정이었다. 그림은 목적이 아니라 사유를 돕는 도구였기에 생각이 완성되면 붓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으로 자연을 탐사하던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한다. “자연은 경험이 절대로 보여주지 못한 무한한 원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첩 한 구석에 이렇게 쓴다. “나는 계속하리라.” 위대한 탐구자만이 만날 수 있는 인간 이성과 경험의 한계에 이른 뒤에, 그는 겸허한 태도로 경이로운 자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생의 마지막까지 자연을 탐구한다. 그것이야말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놀랍도록 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준 위대함이었다.

구윤숙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2011-08-1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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