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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걸어온 길] (10) 한국 신무용의 큰 어른 김백봉<하>

[명사가 걸어온 길] (10) 한국 신무용의 큰 어른 김백봉<하>

입력 2013-05-06 00:00
업데이트 2013-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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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멋 담아 숨 쉬듯 흩날려온 몸짓

손이 참 곱다. 피부가 하얗고 손가락이 길다. “어른들은 갈치손이라고 하더라고. 근데 춤을 출 때는 이게 큰 장점이에요. 손가락을 모으는 동작 하나를 해도 동그란 모양과 길죽한 모양, 모두 달리 제대로 보이니 이것만으로도 표현이 명확해지는 거죠.” 정갈하게 관리한 손으로 엄지와 중지 끝을 맞대도 보고, 허공으로 쭉 펴 올리기도 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어르신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이 터졌다. “아이고, 고우셔라.”

풍경을 맞잡은 손이 곱다. 김백봉 선생은 이 하얗고 긴 손으로 부채를 잡아 ‘부채춤’을 만들고, 긴 칼을 쥐고 ‘장검무’를 추는가 하면 다양한 수인(手印·부처의 손모양)을 본뜬 ‘만다라’를 내놓으며 한국 신무용사에 굵직한 선을 그었다.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풍경을 맞잡은 손이 곱다. 김백봉 선생은 이 하얗고 긴 손으로 부채를 잡아 ‘부채춤’을 만들고, 긴 칼을 쥐고 ‘장검무’를 추는가 하면 다양한 수인(手印·부처의 손모양)을 본뜬 ‘만다라’를 내놓으며 한국 신무용사에 굵직한 선을 그었다.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대한민국예술원 회의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김백봉(86) 선생은 인터뷰를 위해 찾은 서울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를 둘러보며 추억의 편린을 하나 꺼냈다. “예전에 여기서 가야금을 배운 적이 있었어요. 여기 이 집(사찰 앞 보현다실)을 부부가 운영했는데….” 가야금을 배운 이유는 “춤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이라는 짤막한 말로 대답했다.

평생이 춤이었다. 공기를 들이마시듯 춤을 추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울 때는 스승처럼 되고 싶어서,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 춤추었다. 6·25전쟁을 겪은 뒤에는 무용가로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난 춤을 추고 싶어서 세상에 온 사람이라 언젠가는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춤 출 수 있길 바랐나봐요. 선생님을 떠나 혼자가 되면서 내 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선생이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열었던 첫 개인 발표회가 창작의 출발점이 됐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본 것, 생각한 것, 들은 이야기, 그런 것들이 창작의 바탕”이라고 했다. 당시 공연한 소품들도 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춤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공연은 결혼식에서 본 고전 복식과 장신구에서 영감을 받은 ‘고전형식’, 전통사상인 효(孝)를 바탕으로 한 ‘지효’ 등으로 구성했다. ‘고전형식’은 이후 1960~1970년대 한국 국제문화사절단의 주요 레퍼토리이자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2000명이 함께 추면서 세계를 감동시킨, 선생의 대표작 ‘화관무’의 원형이 됐다. ‘지효’는 ‘무용극 심청’(1975)으로 확장됐다.

6·25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1953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무용연구소를 내자 무용을 배우겠다는 아이들이 넘쳐났다. “김백봉의 제자로 삼아달라”면서 우리나라에서 대단한 권력자와 재력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사상적으로는 간첩 오해를 받으면서 간헐적으로 경찰서에 불려다녔는데도, 예술적으로는 8·15광복기념예술제에서 ‘조국찬가’를 안무하는 실력자로 인정받았으니, 삶이 참 아이러니하다. 1953년에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나서야 사상적 굴레는 조금씩 풀려갔다.

1954년 서울시공관에서 연 월남 이후 첫 발표회는 한국 신무용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때 ‘부채춤’을 처음 선보였고, 당시 언론들은 “한국무용사의 여명기”, “한국무용에서 뚜렷한 전진” 이라면서 극찬했다.

스승 최승희의 ‘보살춤’과 김백봉 선생의 ‘청공’을 엮어 1996년 낸 대작 ‘만다라’. 서울예술단 창단 10주년 공연에서 초연했다.
스승 최승희의 ‘보살춤’과 김백봉 선생의 ‘청공’을 엮어 1996년 낸 대작 ‘만다라’. 서울예술단 창단 10주년 공연에서 초연했다.


한평생 무용예술인으로서 산 김백봉 선생은 2005년 한국무용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평생 무용예술인으로서 산 김백봉 선생은 2005년 한국무용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김백봉 선생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남편 안제승과 가족. 아들 병철(맨 뒤·한의사)을 제외하고 두 딸, 병주(안씨 앞)와 병헌(김 선생 앞)은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다.
김백봉 선생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남편 안제승과 가족. 아들 병철(맨 뒤·한의사)을 제외하고 두 딸, 병주(안씨 앞)와 병헌(김 선생 앞)은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다.


김 선생은 “다른 나라 춤은 표현이 대부분 똑같은 형식이에요. 일본은 달이나 벚꽃을, 그리고 중국춤은 문을 여는 동작이 많죠. 그런데 우리 춤엔 그렇게 정형화된 게 없어요. 팔을 뻗는 동작만으로도 함축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낼 여지가 참 많죠. 거울을 보며 동작을 해보면 참 멋있을 때가 있거든. 한과 흥, 멋을 담고 그걸 제대로 전달하는 게 공연인 거죠.”

춤 얘기가 나오자 차근차근, 하지만 끊이질 않고 말을 이었다.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는 선생은 “특히 무용수들이 상하로 교차되거나 두 사람이 서로 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참 묘미가 있다”면서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동석한 김 선생의 큰딸 안병주(52) 경희대 교수는 “어머니가 이러신다. 집에서도 대화가 다 춤 얘기다. 밥 먹을 때도 무용, 작품, 무용가 얘기뿐”이라고 거들었다. 남편 안제승(1922~1996, 전 경희대 교수)은 무용이론가로서 김 선생의 무용 대본에 도움을 주고 ‘부채춤’을 제안하는 등 든든한 조력자였다.

한의사인 아들 안병철(66)을 제외하고 두 딸 안병주 교수와 안병헌(49)까지 모두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춤 외에 다른 대화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싶다.

“지금도 잠들 때까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자야겠다’고 마음 먹고 잔 적이 없죠. 이런 동작을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생각하다가 스르르, 그냥 잠드는 거예요.”

인생이 온통 춤으로 채워진 선생에게 1971년에 위기가 닥쳤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의사는 “이제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무용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선생은 낙담하는 대신 춤인생의 종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오히려 춤으로 승화했다. “춤으로 재활한 거죠. 자연의 운동 원리를 따랐어요. 무리하지 않고 관절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움직임을 연결시켜 나갔죠. 손을 위로 올리는 동작도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뿜으면서,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하면서 몸을 같이 움직입니다. 황병기 명인의 가야금 산조 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따라가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어요.” 이렇게 ‘청명심수’(1974)가 탄생했다. 이 작품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극복 등 선생의 고난의 시절이 녹아 있다.

후유증으로 아직도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하지만 선생은 “아마 그때 정부에서 외국에 공연을 가라고 했는데 못 간다고 했다가 벌 받았나 보다”는 농을 덧댈 정도로 춤인생의 극적인 한 장면으로 남겼다.

‘무용극 우리마을 이야기’(1956), ‘희화’(1958), ‘장고춤’(1959), ‘생의 약동’(1965), ‘풍속도’(1967), ‘산조’(1973), ‘무용극 심청’(1975), ‘타의예’(1981), ‘만다라’(1996), ‘청계’(2005) 등 김 선생이 만든 창작품은 600여편에 이른다. 하지만 많이 소실됐다. 초기작은 거의 없고 ‘부채춤’과 ‘심청’, ‘장구춤’ 등은 대한뉴스에서 방송했던 영상 정도로 남아 있다.

그의 예술세계는 그동안 길러낸 후진들에게 스며들어 있다.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서라벌예대 등에서 가르치면서 대학의 무용전공학과 개설에 앞장섰다. 1964년 경희대에 무용과를 만들어 199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교수로서 무용교육에 몸담았다. 선생은 “무용을 예술 장르의 가장 마지막으로 보는 게 너무 분해 학교에 들어가서 지위를 상승시켜 보려 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배출한 많은 제자들이 곳곳에서 전통과 현대를 무용으로 이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모든 국가행사에서 한국무용이 으뜸이 되고, 한국의 정체성이 무용으로 분출되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봤을 터. 흐뭇한 미소와 만족감이 가득할 줄 알았던 원로 무용가에게서 그러나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이라면서 어렵사리 운을 뗀 선생은 쓴소리를 토해냈다. “무용에 대한 인식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너무 분해요. 무용의 지위 격상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가르쳤거든. 그런데 요즘은 무용이 대학 입학의 목적인 경우가 많아요. 예쁘게 가꿔서 결혼하고, 이력서에 그저 한 자락 걸치는 정도로 무용이라는 게 쓰이니까 속상해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스승의 집에서 빨래를 하고, 수발 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용 하나만 바라보고 ‘미쳐주길’ 바랐다. “무용관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무용에 빠지지도 않으니까. 예전에는 대학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보면 누가 무용과 학생인지 단번에 티가 났어요. 오라(aura)가 그냥 풍기는 거야. 근데 요즘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무용하려는 아이들이 더 많으니…. 연습도 별로 안 하지. 무용관이 무슨 상관 있겠어.”

예술가들이 너도나도 교수가 되려는 현상도 지적했다. “돈을 버는 게 경쟁력이 되는 사회이다 보니 훌륭한 예술인이 교수가 되려고 해요. 벌이가 되지 않으면 연습실을 갖기 어렵고 제자 양성이나 예술지원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공연할 때 나오는 의상, 소품 등도 다 보관을 해야 문화적 자산이 되는데 이 돈이 만만치 않거든요.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런 지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무용이 무엇이냐고 묻자 선생은 “기자들이 쓰는 글과 똑같다”고 했다. “춤으로 표현을 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무언가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죠.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생명력을 잃은 거예요. 구체화한 메시지를 주거나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적이다’, ‘아름답다’라는 그 자체라도 좋아요. 그러기 위해 무용수는 완성된 춤을 추고, 관객은 춤의 성격을 잘 알고 객석에서 바라보면, 무용수와 관객이 합일을 이루면서 공연이 완벽해지는 겁니다.”

그의 춤 철학을 다시 무대에서 볼 수 있을까. 김 선생은 대번에 “내가 춤을 추는 건 사기”라고 말했다. “늙은 사람이 젊었을 때처럼 움직이겠어. 내 마음에 있는 걸 내 몸이 마음대로 풀어주질 못하니까 나도 속상하고, 관객들에게 미안하죠.” 거장은 “춤이 없었다면 뭘 하고 살았을까”라면서 나직하게 웃었다. 80년 동안 거장이 걸어온 예도(藝道)가 무대 밖으로 더 넓게 흘러가길.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2013-05-0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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