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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한의사 전문 의료기기 사용 허용해야 하나/허대석 서울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

[열린세상] 한의사 전문 의료기기 사용 허용해야 하나/허대석 서울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

입력 2015-01-28 23:54
업데이트 2015-01-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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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 서울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허대석 서울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작은 가게를 하거나 건물을 지어 본 사람이라면 왜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시대에도 맞지 않는 수많은 관련 법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렇게 국민이 생업을 이어 가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불합리한 규제들을 없애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빌미로 정부는 엉뚱하게도 국민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장치들을 없애는 일을 하고 있다. 신약을 상용화하기 전에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상시험을 의료산업을 저해하는 규제라고 축소하며 환자의 안전보다 업체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더니 최근에는 한의사가 안과, 이비인후과 등에서 사용하는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규제 완화 정책이라고 추진하고 있다.

한의사협회는 보건복지부와 때를 맞춘 것처럼 헌법재판소가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청력검사기 등은 신체에 위해를 발생시키지 않으며 한의사가 충분히 판독 가능하다’며 이러한 의료기기들을 한의사가 사용하는 것이 위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한 것을 근거로 CT, MRI, 초음파, 내시경 등 모든 의료기기에 대한 한의사 사용권을 허용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의사협회가 한의사협회의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언론은 밥그릇 싸움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현 사태의 본질은 직역 간의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논란이 돼 온 한의학의 정체성 문제를 잘못된 방법으로 미봉하려는 정부의 대책에 있다.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의대가 설립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한방 의료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현대의학과는 접근하는 근본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현대의료기기로 검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객관적인 검증을 거부해 오던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게 해 달라며 지금까지의 주장과 상반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한의대 교육 과정의 75%가 일반 의대와 같다는 것을 밝힌 한의사협회의 기자회견 내용을 통해 한의학의 한계와 정체성 혼란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의학에 대한 논란보다 더 큰 문제는 국가 면허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정부의 원칙 없는 정책이다. 자동차 운전면허도 책으로 공부했다거나 할 줄 안다고 주장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시험에 합격해야 취득할 수 있으며, 운전의 난이도가 다른 자동차의 종류에 따라 면허 종류도 달라진다.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가 있는 면허는 검증과정이 더욱 철저하다. 의사 면허를 얻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을 수료한 후 교육받은 것을 실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국가고시인 필기와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의사 면허를 취득한 자가 4~5년 이상의 추가적인 임상수련을 거친 뒤에야 독자적으로 전문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특히 CT나 MRI 같은 진단기기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영상의학과 전문의로부터 별도의 판독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한의사들은 교육과정에서 진단의학, 방사선학을 충분히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의료법에 근거하면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를 할 수 있고, 한의사는 한방 의료와 한방 보건지도에 대한 면허를 인정받고 있다. 단지 강의를 들었다는 주장에 기초해 공인된 검증 과정 없이 전문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위법일 뿐 아니라 국가 면허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의사들이 한의학 강의를 들었으니 한방기기를 이용한 진료를 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대로 교육받았는지 검증받지 않은 자가 전문 의료기기로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을 원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정규 의학 교육을 받고 정식 수련 과정을 거친 의사가 전문 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는 평형수처럼 환자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편의성을 앞세워 안전을 경시하는 규제 완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세월호나 의정부 아파트 화재 등 수많은 사고에서 이미 확인했다. 국민의 편의와 경제적 이익을 위한 규제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국민의 안전이, 의사에게는 환자의 건강이 경제적 이익과 편의보다 우선이라는 원칙이 규제 개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2015-01-2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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