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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함께 떠오를 미수습자 9명…“이제 곧 만나길”

세월호와 함께 떠오를 미수습자 9명…“이제 곧 만나길”

입력 2017-03-23 11:15
업데이트 2017-03-2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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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딸·딸 같은 아들…끝까지 학생 곁을 지킨 교사제주서 새 출발 꿈 일가족…“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버텨온 3년”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1천73일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에 성공해 세월호가 물 위로 떠오르길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려온 건 9명의 미수습자 가족이다.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버텨온 3년 세월이다.

이들 미수습자 가족에겐 아직도 아들, 딸,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사고 피해가 가장 컸던 단원고에선 희생 학생 4명과 교사 2명이 3년 가까운 긴 시간을 바닷속에서 기다려왔다.
단원고 실종자 허다윤양의 어머니 박은미(왼쪽)씨와 아버지 허흥환씨.
단원고 실종자 허다윤양의 어머니 박은미(왼쪽)씨와 아버지 허흥환씨.
◇ 단원고 학생 4명…‘지금이라도 현관문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수학을 유독 좋아했던 조은화(사고 당시 2학년 1반) 양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다. 숫자 계산과 정답 맞히기에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회계 분야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꿈이었다.

집에선 엄마와 무척이나 가깝게 지냈다.

등교할 때면 ‘버스에 탔다’고, ‘어디를 지났다’고, ‘학교에 도착했다’고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집에 돌아와서 씻을 땐 엄마를 변기에 앉게 하고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얘기하는 살가운 딸이었다.

엄마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앞에 앉아서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 주고, 아침에 학교 갈 때 엄마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하굣길에 간식거리를 사와 건넬 정도로 정 많은 아이였다.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던 허다윤(2반) 양은 중학생 때부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즐기는 데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했던 여고생의 꿈은 세월호 침몰과 함께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윤이는 엄마에겐 친구 같은 딸, 아빠에겐 애인 같은 딸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마중 나와 달라’는 문자를 보내오던 다윤이의 모습이 엄마 눈엔 아직도 아른거린다.

3년 전 수학여행 길에 오르면서 아버지의 검정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그 모자를 빌려 가던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는 “아빠의 모자도, 다윤이가 입고 간 옷, 신발이 모두 올라왔는데, 다윤이만 나오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난 3년간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견디고 기다렸다”며 “세월호를 인양해 우리 딸을 꼭 찾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2남 중 막내인 박영인(6반)군은 성격도 발랄하고 쾌활해 부모님에게 딸 같은 존재였다. 또래 사춘기 친구들과 달리 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척척 해내고 아버지와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곧잘 나눴다.

주말마다 부모님 여행에 항상 따라나서는 ‘엄마·아빠 바라기’였다.

영인이는 만능스포츠맨으로도 통했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야구 등 구기 종목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볼링부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특히 축구를 좋아해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는 게 일상이었다. 체대로 진학해서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영인 군의 어머니는 사고 전 아들이 “축구화를 사달라”고 했지만, 미처 사주지 못한 게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사고 이후 새 축구화를 팽목항에 가져가 영인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영인 군의 아버지는 “영인이보다 먼저 발견된 교복과 운동복 등은 아직 안산 집에 그대로 있다”며 “영인이가 웃던 모습이 조금 전에 본 것처럼 생생하고 언제든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고 말했다.

영인이와 같은 반이었던 남현철 군은 5반 고(故) 이다운 군의 자작곡 ‘사랑하는 그대여’의 작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현철이는 기타실력도 상당했다.


◇ 단원고 교사 2명…끝까지 학생들 곁 지켰다

경기도 안산의 한 중학교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해 줄곧 중학교에만 있던 고창석 교사는 2014년 3월 단원고로 발령받은 지 한 달여 만에 변을 당했다.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고 교사는 대학생 때 인명구조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 세월호 사고 당일에도 고 남윤철 교사와 함께 학생들의 탈출을 돕느라 본인은 정작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 사고 후 조문 온 한 제자는 가족에게 ‘선생님께서 2005년 중학교 근무 당시 학생휴게실에 불이 나자 소화기를 들고 가장 먼저 뛰어와 진화하셨다’는 기억을 전해주기도 했다.

고 교사는 아내(39)를 항상 살뜰하게 챙기기로도 유명했다. 아내는 단원고 바로 옆에 있는 단원중 교사였다.

고 교사는 행여 아내가 아침밥을 먹지 않고 출근하면, 학교 사이 담장 너머로 간식거리를 챙겨주곤 했고,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는 미리 꽃을 준비하는 세심한 남편이었다.

고 교사의 아내는 세월호 참사 당일 아침 남편으로부터 받은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고 전했다.

양승진 교사는 학생들에게 듬직한 선생님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에도 선체가 기울자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학생들이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 일반 승객 3명…제주도로 이사해 새 출발 하려다 참변

세월호 미수습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권혁규(사고 당시 7세)군은 아버지 권재근(당시 51세·미수습)씨와 어머니 한모(당시 29세·사망)씨, 여동생 권지연(당시 6세)양과 제주도로 향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권 군 가족은 이날 화물트럭에 이삿짐을 한가득 싣고 제주도의 새집으로 이사하던 길이었다.

권 군의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끝내고 감귤 농사를 지으려고 제주도 귀농을 결정했던 터였다.

제주도에서 새 출발 하려던 일가족에게 세월호가 마지막 추억으로 묻혀버렸다.

평소 한 살 어린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꼈다던 권 군은 사고 당시에도 어머니를 도와 여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탈출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 양은 이후 단원고 2학년 박호진 군 등 생존자들에게 발견되면서 구조됐으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는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됐다.

또 다른 미수습자인 이영숙씨는 1년 뒤 제주도로 이사 올 아들의 짐을 싣고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어렵게 아들을 키워 온 이씨는 아들과 떨어져 지낼 때가 많았기 때문에 머지않아 아들과 함께 지낼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오다 간절한 소망을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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