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게 호감 품은 남자, 사랑일까

시인 베를렌과 랭보의 사랑은 18 70년대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랑의 행로가 그렇듯, 시인들의 사랑도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잔인한 이별이었다. 언쟁을 벌이다 격분한 베를렌은 랭보를 향해 총을 쐈다. 손목에 총알이 박힌 랭보는 베를렌을 경찰에 신고했다. ‘토탈 이클립스’(1995)는 이 사랑의 전말을 담은 영화다.
이 작품을 염두에 둬야 김양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시인의 사랑’이 더 깊게 보일 것 같다. 우선 시인 택기(양익준)를 베를렌에, 그가 애정을 느낀 소년 세윤(정가람)을 랭보에 겹쳐 놓자. 그다음 이 영화와 ‘토탈 이클립스’가 공명하고 분화하는 지점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택기는 제주 곶자왈의 시인이다. 하지만 제일 먼저 슬픔을 느끼고, 다른 사람 대신 울어 주는 시인으로 살기는 쉽지 않다. 경제적 무능력도 그를 위축시킨다. 시로는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 수 없다. 생계는 내성적인 택기와 달리 매사 쾌활한 아내 강순(전혜진)의 몫이다. 남편에게 종종 잔소리는 해도 그녀는 그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강순이 택기를 많이 사랑해서다. 그러던 어느 날 택기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세윤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혼란스럽다. 이런 자신의 감정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괴로워하는 세윤. 그런 그에게 택기는 유일한 의지가 돼 준다.

그러나 세상은 택기의 마음을 한마디로 곡해한다. “너 걔랑 자고 싶은 거지?” 그의 변화를 눈치챈 강순의 말이다. 남편이 소년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그녀의 심정은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으리라. 한데 이와 별개로, 택기가 세윤을 통해 경험하는 다층적 정서도 이렇게 단순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의미의 획일화는 시인을 비탄에 빠뜨리는 끔찍한 폭력이다. 평범한 단어로 다 나타낼 수 없는 감각의 세밀한 결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한 시어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곧 섹스로 등치하는 이들에게 ‘시인의 사랑’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랭보의 말마따나 사랑은 재발명돼야 한다.

앞서 ‘토탈 이클립스’와 ‘시인의 사랑’을 비교·대조해 볼 것을 권했다. 베를렌이 택기와, 랭보가 세윤과 유사하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그러면 두 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19세기 프랑스와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차이와 맞물려 있다. 이것은 사랑의 충동에 온몸을 내맡긴 그들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함께 떠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른다. 낭만주의적 전자와 현실주의적 후자의 거리는 멀다. 지금 이곳에서 베를렌과 랭보의 동행은 허락되지 않는다.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데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오늘날 시인의 사랑은 체제가 용인하는 온건한 범주 안에서만 작동한다. 14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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