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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떼거리 서점 유랑단과 록키 발보아/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떼거리 서점 유랑단과 록키 발보아/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입력 2017-11-22 17:52
업데이트 2017-11-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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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지난달 초에 KBS 작가와 다큐멘터리 감독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신년에 방영할 책 관련 특집을 만들기 위해 출판계 종사자들을 만나서 아이디어를 얻는 중이라고 했다. 그중 누군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던 모양이다. “꽤 특이한 도서 이벤트를 자주 하신다고 들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작가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했던 이벤트처럼 재미있는 책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좀 난감하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비슷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적당한 보수를 지불할 테니 재미난 뭔가를 기획해 달라며 모임이나 행사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거절했다. 북스피어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는 잘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내가 몽땅 책임지면 그만이니까 부담이 전혀 없지만 북스피어를 벗어난 이벤트는 망하면 이만저만 민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총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면 나름대로 재치 있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태도를 견지하지만 내가 판 전체를 장악할 수 없는 곳에서는 앞에 나서기는커녕 사람들과 눈도 못 맞추는 청맹과니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 가면 급격하게 말수도 줄어들어서 ‘뭐 저렇게 건방진 인간이 다 있나’라는 식의 오해를 받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스피어가 계획한 이벤트 중에서 아이템을 하나 건져 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마침 다음달에 유럽의 서점들을 출판사와 독자가 함께 구경해 보자는 ‘떼거리 서점 유랑단’ 행사가 잡혀 있었다.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프로모션 대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차원에서 만들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냥 재미 삼아 해 보는 것인데 작가와 감독은 이게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일단 내부 회의에서 아이템이 채택되면 작가와 감독과 카메라맨이 현지에 와서 촬영하기로 했다. 그사이에 나는 유랑단에게 동의를 구해 두었다. 우리는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에서 만났는데 당일에야 두 가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하나는 KBS의 사정으로 아이템 채택 결정이 늦어지면서 차일피일 시간이 흐르자 급한 마음에 감독이 혼자 카메라만 달랑 들고 날아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유랑단 중 상당수가 화면에 나가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부터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노장 감독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는 유랑단의 저녁 식사 자리에 불쑥 나타나더니 사비를 들여 와인을 한 잔씩 돌렸다. 그러고는 촬영 관련 얘기는 일절 하지 않은 채 허심탄회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풍부한 화제와 유쾌한 말발은 좌중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고속버스의 짐칸이라도 좋으니 태워 달라는 그의 부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로 향하던 버스가 휴게소에서 기름을 넣는 동안 그가 잽싸게 머릿수대로 아이스크림을 사 왔을 때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버스에서 내려 뒤셀도르프의 서점으로 가는 중에도 그는 한눈팔지 않고 유랑단을 에스코트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마이에르세 서점에서는 대부분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아마도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라고들 생각하지 않았을까. 촬영 말미에 아이템이 채택됐다는 연락이 한국에서 왔다며 그는 12라운드를 끝마친 록키처럼 웃었다. 그날 이후로 소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기적인 나의 본성이 거슬릴 때마다 그 웃음을 떠올리곤 한다. 록키 발보아 같은 웃음을.
2017-11-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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