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그런데도 여러 공간에서 ‘본’들은 왕성하게 쓰인다. 전통과 관습과 보이지 않는 형식이 뒷받침한다.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큰 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탈 없이 잘 써 왔고, 나름 괜찮은 전통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본 협회는’, ‘본 연구에서는’, ‘본 프로그램은’, ‘본 입찰과 관련하여’…. 이 ‘본’들은 장롱 안쪽에 있던 예복 같은 말들이기도 하다. 예복이 그러한 것처럼 격식을 갖추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꺼낸다. 그러면 뒤의 말들은 살짝 장막을 드리운 것같이 흐릿해진다. ‘본 협회’들에는 무게와 엄격함이 씌워진다. 그러나 세상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칙칙하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본 협회’보다 ‘우리 협회’, ‘본 프로그램’보다 ‘우리 프로그램’ 혹은 ‘이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예가 더 많다.
그럼에도 ‘본’을 쓰는 데는 권위와 품위도 있다. 더 권위 있는 기관이고 연구이고 싶은 속내가 있다. ‘이 연구’는 ‘본 연구’보다 가볍다고 여긴다. 행사장의 말과 연구기관 보고서의 글에서는 ‘본’이 일상이겠지만, 대중과 접하는 자리로 나오면 낡은 것이 되고 만다.
2017-12-28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