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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다가오는 것/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다가오는 것/강의모 방송작가

입력 2017-12-27 17:26
업데이트 2017-12-2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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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모 방송작가
강의모 방송작가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이가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순간 갈등한다. ‘누굴까. 모르는 얼굴인데….’ 몇 걸음 가까워지는 아주 짧은 순간이 매우 혼란스럽다. 잠시 미적거리는 사이, 그는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휙 지나가 버린다. 황망하여 돌아보니 내 뒤의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당혹한 감정을 헛웃음으로 눙치며 다시 길을 걷는다.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나를 향해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버린 그 또는 그것.

집에 돌아오자마자 IPTV로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2016)을 찾아냈다. 처음 봤을 땐 이자벨 위페르의 강퍅한 표정에 마음이 쏠려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되잖게 나의 삶을 투영시키다 보니 좀 아프기도 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비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다시 결제를 하고 텅 빈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속엔 이자벨 위페르가 혼자 빠르고 조급하게 걷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온다. 늙음에 저항하며 딸의 삶을 훼방하는 홀어머니, 25년을 함께 살다 갑자기 다른 여인에게로 떠나버리는 남편, 철학교사로서 올곧게 지켜온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출판사 등등. 잔인하게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을 빠르게 지나치고자 그녀는 그리도 걸음을 재촉했을까?

빠르게 다가온 건 금세 지나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잊힌다. 천천히 다가온 건 서서히 스미며 오래 남아 생을 지탱한다. 그녀를 절망시켰던 것들은 다가온 속도대로 사라졌다. 그녀를 지킨 건 오랫동안 마주하며 착실하게 쌓아 온 이성과 가치였다.

그녀는 수업을 하며 이런 글을 읽는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람 불어 오는 삶의 한 지점에서 온전히 자유와 품위를 찾아낸 한 인간의 여정을 다룬 탁월한 여성 영화이면서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다.’

자유와 품위, 내 생각에 이 둘을 갖추는 건 모든 걸 갖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젊은 날엔 감히 욕심낼 수 없는 경지다. 늙음을 감추지 않는 위페르의 얼굴과 몸은 얼마나 당당한가. 쓸쓸하고 허탈해지기 쉬운 연말에 이 영화로 마음을 다독인 건 참 좋은 선택이었다.

박재삼의 시 ‘千年의 바람’이 생각났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

이 시에 매료되었던 게 20대 초반인데, 여전히 좋다. 이미 그때부터 천 년의 바람 속에 내 삶을 아주 작은 점으로 보고자 노력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여전함이 그동안 내게 다가온 것들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 세 걸음 남은 2018년도 성급하게 마주하면 그만큼 빨리 스쳐갈 것이기에, 되도록 느긋한 맘으로 천천히 맞을 참이다. 자연에 반항하지 않는 속도로.
2017-12-2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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