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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 칼럼] 한·일 60점이면 어때

[황성기 칼럼] 한·일 60점이면 어때

황성기 기자
황성기 기자
입력 2018-10-03 20:32
업데이트 2018-10-0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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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시작해 8월 말 끝난 ‘프로듀스 48’은 한국, 일본의 아이돌 연습생이 겨룬 생방송 오디션 TV 프로그램이다. 음악 전문 케이블인데도 최고 시청률 3.1%를 기록할 만큼 10~20대의 인기를 모았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들이 우리말과 일본어로 노래하는 장면만이 아니었다. 90여명을 12명으로 압축하면서 다음 단계로 진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탈락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국적과 경쟁 관계를 초월해 서로의 모국어로 기쁨과 안타까움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김대중·오부치 21세기 파트너십 선언’이 없었더라면 제작 자체가 불가능했을 프로그램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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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 평화연구소장
황성기 평화연구소장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이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이 선언은 정체돼 있던 한·일 관계를 몇 단계 끌어올렸다. 빗발치는 비판에도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김 대통령의 결단은 몇 년 뒤 역설적으로 일본의 한류 붐을 일으킨다. 외교부조차 국민 여론을 의식했던 당시의 대중문화 개방 반대는 돌이켜보면 우리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을 과대평가한 씁쓸한 소동이었다.

한·일 관계를 20년간 지켜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일 관계를 그래프로 그리면 최고점이 선언을 발표한 1998년이라는 점이다. 한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김 전 대통령이 일본 국회에서 연설을 하고, 일본인의 찬사를 받았다. 오부치 전 총리도 식민지 지배를 겸허히 사죄하는 말을 선언에 담아 한국민의 호평을 얻었다. 그때를 100점으로 치면 지금 한·일의 ‘정치적 관계’는 60점 정도다. 김대중(1924년생), 오부치(1937년생)는 우리로 치면 해방 전, 일본으로 치면 전전(戰前) 세대다.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했고, 역사에 대한 일본의 부채의식도 존재했다. 해방 이후, 전후 세대인 문재인(1953년생), 아베(1954년생) 시대의 한·일이 좋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일본 교토의 사립 명문 리쓰메이칸대학이 온천으로 유명한 오이타현 벳푸시의 산 중턱에 2000년 설립한 APU(리쓰메이칸아시아태평양대학)에는 개교 첫해부터 한국 고등학교 출신 85명이 들어갔다. 90개국에서 학생이 몰리는데 올해 한국 출신 신입생은 정원 1260명의 10% 가까운 120명이었다. 내년 한국인 유학생 누계가 2000명을 돌파한다. 이 학교를 나온 한국인의 절반은 일본에서 취업·진학하고 나머지는 귀국하거나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등으로 진출한다. 지금은 우리 고등학생이 유학하고 싶은 일본 대학의 상위 반열에 올랐다. 얼마 전 서울에 온 데구치 하루아키 APU 총장은 “전 세계에서 인재를 모아 가르쳐 전 세계로 내보자는 설립 이념에 따라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한국에서 가장 많은 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APU가 일본에서 한국인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면, 프로듀스 48은 일본인 연습생을 한국에서 키운다. 샤이니의 열성 팬으로 7년간 한 해 4차례씩 서울을 찾는 50대 일본 여성, 방탄소년단을 좋아해 서울에 오는 일본 여대생, 트와이스에 빠져 도쿄의 코리아타운까지 어머니와 함께 왕복 7시간 걸려 다니는 일본의 지방 초등학생. 모두 지인의 부인, 딸, 친척의 얘기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전 주한일본대사의 혐한 책이 팔리는가 하면, 한편에선 한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젊은 남녀들이 존재하는 일본이다. 한국은 어떤가. 취업 지옥을 벗어나 일본에서 직장을 잡은 한국 청년이 지난해 2만명을 넘어섰다. 맛집, 가볼 만한 곳을 찾아 툭하면 일본을 찾는 사람이 올해 750만명을 넘을 거란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잘하는 일이다. 사람과 돈, 물건이 이렇게 오가는 요즘 정부 주도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화해치유재단 해산 문제, 욱일기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한·일의 21세기 기초를 다진 ‘1998년 정신’을 늘 되새기길 바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년 전 일본 국회에서 했던 연설의 일부다. “한·일이 불행했던 것은 400년 전 일본이 침략한 7년간과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중략) 두 나라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핵심은 과거를 직시한 미래지향적 관계다.
2018-10-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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