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누구
1941년 스무살에 일본 건너가 기술 택해와세다고등공업학교 졸업 후 사업 시작
27세 껌 제조업 손 대… 이듬해 롯데 출발
제과·호텔·쇼핑 앞세워 70년대 10대 재벌
근면·마케팅 감각 갖춘 ‘타고난 장사꾼’
경영 철학은 ‘화려함 멀리하고 실속 추구’
최고층 건물 건립 꿈 ‘롯데월드타워’ 실현
신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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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에게는 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지런했고 약속을 잘 지켰으며,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 눈이 밝았다. 19일 타계한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은 이 세 가지를 밑천 삼아 맨손으로 거대한 유통제국을 세운 ‘거인’이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 진출, 90개 계열사에 총 매출 95조원의 재계 서열 5위(공기업 제외)로 롯데를 키워냈다. 특히 신 회장은 다른 창업 1세대들과 달리 한일 양국 재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최고령 경영자로서 세기를 넘어 현역으로 끝까지 활동했다는 점에서 더욱 평가받고 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기술을 택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를 나와 1944년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제조공장을 차리면서 첫 사업을 시작했다. 하나미쓰라는 일본인 노인이 대준 거금 5만엔이 종잣돈이었다. 하나미쓰가 ‘조센징’으로 괄시받던 식민지 청년에게 선뜻 호의를 베푼 것은 그의 남다른 성실함과 신용 덕분이었다. 고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를 정확한 시간에 배달하기로 유명했다. 소문이 퍼져 주문이 늘면서 배달 시간을 못 맞출 지경이 되자 직접 배달 아르바이트를 고용했을 정도였다.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두 번의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면서 쓴맛만 안겼다. 좌절도 잠시 일본 패망 직후인 1946년 5월 ‘히카리(광) 특수연구소’란 사업장을 열었다.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비누와 포마드 등의 화장품은 만들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 1년도 채 안 돼 적지 않은 돈을 거머쥔 그는 27세 때인 1947년 친구의 권유로 껌 제조업에 손을 댄다.
신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19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 개장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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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공을 발판으로 1948년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직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출발했다. 회사명은 그가 탐독하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 최대의 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89년 7월 12일 열린 서울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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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그는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고 항변했다.
제과·호텔·쇼핑 등 삼두마차를 앞세워 외식, 중화학공업 분야로 뻗어가며 몸집을 키운 롯데는 1970년대 말 10대 재벌에 진입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온 1997년 이후 롯데는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다각화하고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재계 5위로 덩치를 불렸다.
신동빈(왼쪽에서 세 번째) 롯데그룹 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신 회장은 이날 일본 출장 중에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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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회장의 검박함은 재계 안팎에서 늘 화제가 됐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는 늘 ‘거화취실’(去華就實)을 금도로 삼았다. ‘화려함은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모교인 와세다 대학의 교훈이다. 롯데가 언론에 많이 나서지 않는 것도 본업을 잃으면, 화(華)에 많은 자원이 투입될 수 있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매장 방문 때도 유난을 떠는 직원들에게 불호령이 내려졌다. “내가 손님보다 더 크냐”는 것이다.
고인의 고향 사랑도 남달랐다. 1969년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일대가 대암댐 건설로 모두 수몰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당장 ‘둔기회’를 조직하고 1971년부터 마을잔치를 열었다. 해마다 5월이면 빠짐없이 행사가 열렸고 초기 40여명이던 참석자는 해를 거듭하며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가세해 1000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2017년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횡령·배임 혐의 선고공판이 끝난 뒤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신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고령에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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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2020-01-20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