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달러 구하기 ‘노심초사’…엔화대출자는 원리금 급증에 ‘비명’
원ㆍ달러 환율 급등에 시중은행과 대출자들에 비상이 걸렸다.은행은 단기 외화조달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달러를 더 구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상황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엔화대출자들은 금융위기 못지않게 치솟은 엔화값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외화예금자들만 웃음 짓지만 그마저 없는 기러기 아빠들은 뛰는 달러값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 은행들 “달러 더 구해라” 특명
2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1,066.8원이었던 원ㆍ달러 환율이 이달 23일 1,166.0원으로 한 달도 못 돼 9.3%나 뛰어오르자 시중은행들에는 ‘달러 비상’이 걸렸다.
현재 은행들은 외화채권 발행과 커미티드 라인(마이너스통장 성격의 단기 외화차입) 등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 신한, 하나, 국민은행 등 4대 은행이 확보한 커미티드 라인만 24억달러에 달한다. 이달 초까지 “외화 유동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난주부터 상황이 급박해졌다.
평소 단기 외화차입의 만기연장을 잘 해주던 유럽계 은행들이 “우리 사정이 더 급하다”며 하나둘씩 연장을 거부하고 있다. 외화채권 발행금리는 리보(런던 은행간 금리)가 0.2%포인트, 가산금리가 0.6~0.7%포인트 뛰어오르며 최근 2주일 새 무려 1%포인트 가까이 급등했다.
급기야 금융당국이 지난 23일 시중은행 외환 담당자들을 불러 “금리에 연연하지 말고 최대한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들은 앞다퉈 외화채권 발행에 나서고 있다.
하나은행은 4억~5억달러 규모의 외화채권 발행을 추진하고 있으며, 신한은행도 1억달러 이상의 달러채권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우리은행과 국민은행도 올해 안에 외화채권을 발행할 계획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며 유럽의 대형 은행들도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들의 계획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한 시중은행 외화 담당임원은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외화채권 발행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조금이라도 안정을 되찾으면 그때 시도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 엔화대출자 “금융위기 악몽 되살아나”
은행보다 더 절박해진 사람들은 엔화대출자들이다.
현재 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 외환은행 등 6대 은행의 엔화대출 잔액은 8천484억엔, 무려 13조원 가량에 달한다. 그런데 엔화값이 이달 들어 10.0%나 뛰어 달러(9.3%)보다 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3일 원ㆍ달러 환율 종가는 1,166.0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 10월의 최고가(종가 기준) 1,467.0원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원ㆍ엔 환율은 23일 15.29원으로 끝나 2008년 10월 최고가 15.44원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엔화대출 1억원을 받은 사람은 원ㆍ엔 환율이 10% 오르면 원금을 1천만원 더 갚아야 한다. 이뿐이 아니다. 금리마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
엔화대출의 금리 구조는 ‘리보금리+외화채권 가산금리+개별 가산금리’로 돼 있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닥치면 리보금리와 외화채권 가산금리가 급등한다. 엔화값 급등으로 대출원금이 급증하면 대출자의 신용등급마저 떨어져 개별 가산금리마저 뛰어오른다.
무역업을 하는 이모(45)씨는 “2003년 연 2.6%에 10억원의 엔화대출을 받았다가 금융위기 때 금리가 10% 가까운 수준으로 뛰어올랐다”며 “원금은 둘째치고 이자 갚기도 힘들어 결국 집까지 넘어갔다”고 말했다.
회원 수가 1천500명에 달하는 포털사이트의 카페 ‘엔화 대출자 모임(엔대모)’ 회원들은 엔화값 급등에 23일 긴급 모임을 갖고 대책을 의논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페 회원인 김모씨는 “2006년 연 2.5%로 대출받았다가 금융위기로 금리가 10%까지 올라 힘들었다”며 “카페 회원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로 아직 원금 갚기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환율이 급등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외화예금 없는 기러기 아빠도 ‘울상’
은행 고객 중 유일하게 웃는 사람들은 바로 외화예금자들이다.
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 외환은행 등 6대 은행의 외화예금 총액은 225억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6조원에 달한다. 국민과 외환 두 은행의 외화예금 고객만도 100만명을 넘는다.
원ㆍ달러 환율이 이달 들어 9.3%나 올랐으므로 1억원 어치의 달러를 넣어놓은 사람이라면 1천만원 가까운 이익을 올린 셈이다.
수출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6.여)씨는 “달러가 들어오면 필요자금 이외에는 환전하지 않고 외화예금에 넣어두었다”며 “올해 들어 원화 강세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달 들어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반면 외화예금으로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기러기 아빠들은 밤잠을 설칠 지경이다.
대기업 부장 최모(48)씨는 “지난해 미국으로 아이들과 아내를 보내고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 환율이 급등해 눈앞이 캄캄하다”며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세로 옮길까도 생각해 봤는데 요즘 전세값이 많이 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