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어가는 가을, 맥주를 마셔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신선한 가을 맥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vinepair.com 캡처
(1) “신선한 가을을 마신다” 웻홉(Wet hop) 맥주
신선한 생홉이 가득 들어간 ‘웻홉(Wet hop)’ 맥주는 매해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가을 맥주입니다. 웻홉을 직역하면 ‘물에 젖어있는 축축한 홉’을 뜻하는데요. 정확하게 말하면, 웻홉 맥주란 갓 수확한 홉을 가공하지 않고 곧바로 맥아즙(맥아를 분쇄해 물에 끓여 당화시킨 액체)에 넣어 만든 맥주를 의미합니다.
이 맥주가 특별한 이유는 ‘홉’의 성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맥아(보리), 효모, 홉, 물 등 맥주의 주 원료 가운데 아로마와 쓴맛을 좌우하는 홉은 뽕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덩굴 식물의 꽃입니다. 홉의 역할은 열대과일, 풀 향 등 다채로운 아로마와 쌉싸름한 맛을 내는 것입니다. 맥주가 요리라면 홉은 양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선한 생홉을 의미하는 웻홉이 들어간 맥주는 홉을 수확하는 가을철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맥주다. 한 모금 들이키면 상쾌한 풀내음이 퍼져 마치 숲 속에 와 있는 느낌을 준다.
웻홉이 들어간 맥주를 마시는 것은 그래서 매우 특별한 경험입니다. 가을이 되면 미국의 주요 홉 생산지인 오레건주 아키마밸리 인근 양조장에선 웻홉을 가득 넣은 IPA(인디안페일에일) 맥주를 출시하는데요. 신선한 홉 내음이 그대로 전해져 환상적인 맛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기존 펠릿 맥주에선 잘 느껴지지 않는 풀 향이 코 끝을 자극해 한 모금 들이키면 마치 대나무숲 속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혹자는 웻홉 맥주를 맛보고 “마치 케일 주스를 마시는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생홉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맥주 맛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갓 딴 홉의 신선함과 깊은 아로마를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경기 구리의 핸드앤몰트 양조장은 지난 2015년 한국에서 최초로 웻홉을 넣은 맥주를 출시했다. 이후 매년 가을마다 강원 평창에서 직접 농사를 지은 홉을 수확해 웻홉 맥주를 내놓고 있다.


서울 성동구의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는 지난달 마포구의 도시 농업 인 모임인 ‘파릇한 젊은이’가 옥상에서 길러 수확한 홉을 사용해 IPA 맥주를 출시했다. 사진은 이날 양조에 사용된 홉.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제공
(2) 유럽 전통의 가을맥주, 메르첸
메르첸 맥주도 빼놓을 수 없는 가을 맥주입니다. 메르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겨냥해 출시되는 ‘축제용 맥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가을 맥주 답게 불그스름한 단풍 색을 띠고 맥아에서 오는 캐러멜 류의 달콤함, 고소한 견과, 비스킷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인 비엔나 라거(=엠버 라거) 계열 맥주입니다.


독일의 전통 가을맥주인 메르첸 맥주는 세계 최대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용 맥주로 잘 알려져 있다. 메르첸은 과거 냉장고가 없던 시절 부패가 잘 되는 여름을 피해 3월에 만든 맥주를 가을에 마신데서 유래됐다. Beer festival 캡처


한국에선 일산의 플레이그라운드가 매년 가을 메르첸 맥주를 내놓고 있다. 단풍색을 띄는 메르첸은 깊은 몰트의 풍미가 매력적인 맥주다. 플레이그라운드 제공
(3) 할로윈데이와 호박맥주
10월의 마지막 날인 할로윈 데이에는 호박이 들어간 ‘펌킨 에일’을 드셔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선 가을에 호박이 넘쳐나 도로 한켠에 쌓여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꼭 호박파이를 만들어먹는 미국인들은 맥주에도 호박을 넣어 마십니다. 펌킨 에일은 할로윈데이를 겨냥해 집중적으로 출시되는 완벽한 가을 맥주이지요.
펌킨 에일은 미국 크래프트맥주계 메이저급 양조장들이 가을마다 빼놓지 않고 출시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요. 호박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펌킨에일이 나오는 가을만 손꼽아 기다리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은 쳐다도 보지 않을 정도로 유독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맥주이기도 합니다. 이는 펌킨 에일에 호박 퓨레와 함께 정향, 계피, 생강 등의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호박에서 나오는 달콤함과 향신료 특유의 향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냅니다.


미국에선 매년 할로윈데이를 겨냥해 호박이 들어간 ‘펌킨 에일’이 쏟아져 나온다. 호박 퓨레에 시나몬 등 향신료가 들어가 호박 파이 맛이 난다. 사진은 미국 샌디에이고의 밸라스트포인트에서 만든 펌킨 스카티시 에일의 모습. Cumstomerbeertap.com
펌킨 에일은 가장 미국스러운 맥주이기도 합니다. 영국 식민지 초기 시절, 미국에선 양조에 쓰이는 주요 원료인 몰트가 아주 귀했습니다. 대신 쉽게 얻을 수 있는 옥수수나 호박, 사과 등을 맥주에 넣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호박 맥주의 기원입니다. 1771년 미국 철학회(American Philoshophical Society)가 펌킨 에일 레시피를 처음 기록한 것만 봐도 호박 맥주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1800년대까지 호박이 들어간 맥주는 미국에서 흔한 술이었습니다.
1920년대 금주령 이후로 자취를 감춘 호박 맥주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크래프트맥주 열풍이 시작된 이후 입니다. 창의적이고 개성이 강한 맥주를 만들고자 했던 소규모 양조장의 양조사들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담긴 이 오래된 맥주의 레시피를 변주해 세상에 내놓았고, ‘할로윈에 마시는 맥주’라는 마케팅에도 성공하면서 펌킨 에일은 미국의 대표적인 시즈널 맥주의 하나로 굳어졌습니다.


일산의 플레이그라운드도 ‘펌킨 에일’을 만들어 팔고 있다. 향신료 양을 조절해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 자극적인 맛이 강한 미국의 펌킨 에일보다 좀 더 대중적인 맛이다. 플레이그라운드 제공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맥덕기자 : 소맥 말아먹던 대학생 시절, 영어를 배우러 간 아일랜드에서 스타우트를 마시고 맥주의 세계에 빠져들어 아직까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아보고자, 2016년 맥주 연재 기사인 [맥덕기자의 맛있는 맥주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올해 [시즌 2] 에서는 좀 더 깊이있고 날카로우면서 재미있는 맥주 이야기를 잔뜩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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