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잊은 사람들, 세계가 멈추자 모두가 침묵했다

소통 잊은 사람들, 세계가 멈추자 모두가 침묵했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20-10-29 17:56
수정 2020-10-30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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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돈 드릴로 지음/송은주 옮김/창비/140쪽/1만 4000원

2022년 디지털 붕괴된 뉴욕 배경 소설
이웃들과 안면 트지만 공허한 소통뿐

코로나로 뉴욕 봉쇄 직전에 작품 완성
네트워크 속 단절된 현대인들에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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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3일 오후 6시 50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를 포함한 미드타운과 어퍼 웨스트사이드가 암흑 속에 빠졌다.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대정전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게 될까. 돈 드릴로의 소설 ‘침묵’은 디지털 연결고리가 끊긴 상황을 배경으로 유형의 의미를 찾아간다. 뉴욕 게티/AFP 연합뉴스
2019년 7월 13일 오후 6시 50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를 포함한 미드타운과 어퍼 웨스트사이드가 암흑 속에 빠졌다.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대정전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게 될까. 돈 드릴로의 소설 ‘침묵’은 디지털 연결고리가 끊긴 상황을 배경으로 유형의 의미를 찾아간다.
뉴욕 게티/AFP 연합뉴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는 재난이 상존하는 도시에 살고 있다. 그 결과 비대면, 언택트라는 말이 유행할 만치 서로가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한편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경향이 더욱 심화한다. 그런데 반대로, 물리적 만남은 가능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는 붕괴된 세계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랜선 만남에 더욱 특화된 현대인들은 견딜 수 있을까.

‘침묵’은 2022년 디지털 네트워크가 붕괴된 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토머스 핀천, 코맥 매카시 등과 함께 미국 포스트모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며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돈 드릴로의 최신작이다. 책은 출간 몇 달 전부터 팬데믹이 야기한 고립과 단절에 대한 선견지명을 담아냈다는 평으로 화제가 됐다. 드릴로는 2018년 “맨해튼의 텅 빈 거리에 대한 비전”으로 시작한 이 소설을 코로나19로 뉴욕이 봉쇄에 들어가기 몇 주 전에 완성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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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릴로 ⓒJoyce Ravid, 창비 제공
돈 드릴로
ⓒJoyce Ravid, 창비 제공
소설은 2022년 슈퍼볼이 열리는 2월의 첫 일요일, 원인 모를 재난으로 모든 통신 및 전자 기기가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 모인 다섯 남녀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짐과 테사 부부는 프랑스 파리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착륙 직전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이들 부부를 기다리던 다이앤, 맥스 부부와 다이앤의 옛 제자이자 고등학교 물리학 교사인 마틴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슈퍼볼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텔레비전 화면이 먹통이 되고 휴대폰, 집전화, 노트북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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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전대미문의 재난에 마주해 거시적으로 상황을 조망한다기보다는 이 다섯 사람에게 집중한다. 비행기 사고 끝에 친구의 집으로 간 짐과 테사는 사고 충격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인 데다 한밤중에 전기도 끊긴 터라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맥스는 상황을 알아보려고 이웃들과 처음으로 안면을 트고 거리를 돌아다니지만 속 시원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마틴은 아인슈타인의 원고에서 인용한 문장들을 비롯해 온갖 말들을 쉬지 않고 쏟아 놓지만 앞뒤 맥락도, 듣는 이도 없다. ‘침묵’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모두가 떠들고 있지만 공허한 소통이기에 ‘침묵’과 다를 바 없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전 세계 사람들을 유례없이 가깝게 연결해 놓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도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역설적 단절을 초래했다. 그러나 ‘침묵’은 이러한 혼란에 대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넌지시 말한다. 늘 메모를 멈추지 않는 테사의 행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비행기 사고에 맞닥뜨린 테사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주는 거 잊지 말아야 해.”(50쪽)

맨해튼의 친구 부부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단순한 육체적인 것들을 챙겨야 해. 만지고, 느끼고, 물어뜯고, 씹고. 몸은 그 나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129쪽) 테사는 우리에게 무형의 세계에서 유형의 것들을 늘 돌보고 살펴야 한다는 진실을 전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10-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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