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집 | 독일인 한국연구가 웨르너 삿세 교수] 삼지천 마을 고택에서 희망을 꿈꾼다-자연을 위한, 자연을 향한 마음

[꿈꾸는집 | 독일인 한국연구가 웨르너 삿세 교수] 삼지천 마을 고택에서 희망을 꿈꾼다-자연을 위한, 자연을 향한 마음

입력 2010-06-20 00:00
수정 2010-06-2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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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행을 가더라도 그 과정을 지켜보지 않아요. 차만 타면 금세 졸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어나요. 하지만 난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느리게 사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행운인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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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슬로시티마을,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연히 풀꽃들과 마주친다. 하지만 그 풀꽃에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다. 한눈팔지 않고 목적지로만 향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곳은 잠시의 여유를 선사하는 장소가 된다. 슬로시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3년간 생활을 하고 있는 독일인 웨르너 삿세 교수. 그는 누구보다 먼저 느리게 사는 삶의 매력을 발견했고, 한옥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며 한국에 대한 꿈을 점차 키워나가고 있다.

웨르너 삿세.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돌담길과 돌담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다. 그가 세 들어 사는 곳은 ‘고재욱 가옥’. 그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마당에 붉게 핀 철쭉과 기타 소리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 가옥은 돌담 가에도 안마당에도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마루에 앉아 화단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기타를 연주하며 삿세 교수는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다른 가옥과는 달리 다른 집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하는 이 가옥은 대문이 없다. 그는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게 하고 싶어서 대문을 없앴어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들을 반겼던 한옥의 전통을 그는 작은 것에서부터 이어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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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슬로시티마을 ‘고재욱 가옥’
전남 담양군 슬로시티마을 ‘고재욱 가옥’


‘고재욱 가옥’은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심강 고재욱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3년 전 이곳을 알게 된 삿세 교수는 비어 있던 집을 사용하게 됐고, 부엌과 욕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유지하며 살고 있다.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듯한 느낌, 집이면서도 자연인 듯한 느낌이 좋아 한옥에서 살게 됐어요. 여름엔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있고, 바람과 하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에요.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겨울에 좀 춥다는 것이 있지만 옷만 든든히 입으면 그다지 춥지 않아요.”

날마다 다른 한국 음식을 해 먹고, 전통 가옥과 한국의 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직접 체험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삿세 교수. 그는 흙과 나무, 종이 등 자연 소재로만 지은 집인 한옥에서 한국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나무와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한 장 한 장 올린 기와를 통해 한국의 정서를 느낀다는 그는 철마다 지저귀는 새들과 꽃과 나비를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모든 것이 문화라는 생각으로 곳곳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닌다는 그. 말로만 듣는 것, 책으로 보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건 한국행이었고, 한옥에서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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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한옥에서 살겠다고 말하는 그를 친구들이 만류하기도 했다. 한옥은 솥에 물을 끓이고, 밥을 하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난방도 되지 않는 그런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파트 계단 오르락내리락하기 싫어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이 운동을 한다며 헬스장을 찾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없는 것 같다. 한옥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해 준다. 토방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부터 마당을 걸어 다니는 것까지 모든 것이 사람의 건강까지 생각해 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옥의 불편함보다 편안함이 더 컸다고 말하는 삿세 교수. 그는 이 집에서 한국의 고전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우리 가사문학을 연구했다.

그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66년, 독일 원조로 세워진 나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장인이 한국인에게 기술을 가르칠 학교를 세우겠다고 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 당시 그는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말도 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먹는 것, 자는 것 등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그에게 있어 한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알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불타올랐다. 그 첫 시작은 보훔대학에서 한국학 공부였다. 이어 그는 1975년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보훔대학과 함부르크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독일 최초로 한국학과를 설립했다. 처음 한국학을 공부할 때는 체계적인 과정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그의 두 번째 노력은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서 한국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국의 문화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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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독일인이면서 한국의 문화를 배운다는 건 그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먹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렵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에요. 쉬운 것보다 어려운 것이기에 재미가 있었어요. 50세의 나이에 몽골어를 익혔고, 60세의 나이에 불교학을 연구했다. 한국 문화는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울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옥과 어울리는 그림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청소년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할 수 없었던 그 꿈을 정년퇴임을 한 나이에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한지에 한국의 산수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산과 물, 그리고 바위 등 자연의 모든 것이 그의 붓 터치에 의해 하나하나 옮겨졌다. 동양화 같기도 하고 서양화 같기도 한 그림은 그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따뜻하면서도 푸근한 정, 한국의 산천을 그리면서도 그 안에 흐르는 따뜻한 감정은 흙이라는 안료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일생 그림에 대한 꿈이 있었고, 아마 평생 그림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보다는 하면서 즐겁고,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을 합니다. 특히 그림 앞에 서면 산, 바다, 돌, 나무와 대화를 하게 됩니다. 획을 따라가면서 그 다음 획을 이어가고, 느낌을 토대로 획을 이어나갑니다. 마치 내 손이 마음을 대신해 획으로 풀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 산과 강의 조화, 뾰족하게 삐져나온 산과 들. 화선지 속 스며드는 것과 번짐의 조화를 알고 있는 그는 그림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하고 있다.

그의 바람은 하나다. 한국인, 독일인 구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독일인이 한국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아닌 같은 사람이 같은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한국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글·사진_ 손옥연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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