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전범들은 日 ‘방패막이’ 술책 희생자

조선인 전범들은 日 ‘방패막이’ 술책 희생자

입력 2010-12-28 00:00
수정 2010-12-2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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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한 조선인들은 종전 후 식민지에 침략전쟁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일본의 술책에 휘말려 막대한 희생을 당한 사실이 정부 조사에서 드러났다.

조선인 148명은 전쟁이 끝나고서 연합국 국제전범재판에 넘겨져 BㆍC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거나 장기간 복역하는 등의 피해를 본 것이다.

28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따르면 일본이 연합군 포로를 본격적으로 관리한 것은 1940년 9월부터다.

당시 북부 베트남을 공격해 약 30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만주, 대만, 한반도 등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조선인들은 1942년 5월부터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됐다. 일본군 병력을 보충하고 종전 후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자 한반도에서 감시원들을 뽑아 데려간 것이다.

선발 절차는 접수, 전형, 장행회, 군 최종심사 등 총 4단계였다.

1~3단계에서는 각 지역 관공서들이 회유와 강요 등 수법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고, 일정 학력에 일본어가 가능하면 우대했다.

포로감시원 선발은 신문 공고를 내는 등 모집 형식을 취해 이뤄졌지만, 실제는 조선총독부가 각 읍면에 인원수를 할당한 강제동원이었다.

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점을 일부러 부각했고, 도청ㆍ관청별로 전형을 치르도록 해 지역 간 경쟁도 부추겼다.

이렇게 뽑힌 조선인 3천여명은 두 달간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고 동남아시아 일대 포로수용소에 감시원으로 배치됐다.

이들은 일본군과 연합군 포로 사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나고서 일본에서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일부는 연합국 국제전범재판에서 BㆍC급 전범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패전국의 멍에를 벗었지만,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여전히 전범으로 남은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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