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상하이 등지서 활약…정부 ‘자료 미비’ 되풀이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후손들과 지식인들의 노력에도 국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이 있다.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후손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정부와 관련단체의 관심과 적극적인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주 4·3사건과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것) 당시 수많은 제주도민을 구하며 ‘제주의 쉰들러’로 일컬어졌던 문형순(文亨淳·1901∼미상·평안북도) 선생은 1945년 광복이 되기 전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일제 당시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1930년대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했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활동하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 3개 독립운동단체가 합쳐 만들어진 국민부는 교육활동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 앞잡이 제거,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을 위한 군사활동 등을 벌였다.
문 선생은 당시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문시영(文時映)이란 이명(異名)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북도로 귀향했으나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껴 월남 후 경찰이 됐다.
그는 제주 4·3 당시인 1949년 1월 신설된 성산포경찰서 초대 서장으로 임명됐다.
문 선생은 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나는 망명해 만주에서 10년, 중국 북부에서 10년 동안 잃은 나라를 찾겠노라고 싸웠기 때문에 경찰 행정은 잘 아는 것이 없다. 여러 경찰관은 각자 서장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복무해 달라”고 말하는 등 격식을 따지지 않는 소신 있는 행정을 펼쳐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죽음의 광풍이 온 섬을 휩쓸고 지나갔던 제주 4·3과 6·25 예비검속 당시에도 그는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부당하다’는 이유로 과감히 거부하는 등 수백 명의 성산포와 모슬포 주민들을 구했다.
의로운 행동을 한 문 선생은 훗날 4·3연구가 등에 의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가며 유대인 학살을 막았던 ‘오스카 쉰들러’에 비유되며 ‘제주판 쉰들러’로 불리고 있다.
문 선생은 제주에서 자녀 없이 살다 한국전쟁 당시 외로운 죽음을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내용은 독립운동사,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사,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제주항일인사실기 등 여러 책에 간략히 소개돼 있다.
그러나 문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은 해방 70년이 되는 올해에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06년과 2010년께 고 전정택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이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지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로부터 내려온 답변은 입증자료 미비, 사후행적 불분명으로 보류됐다는 회신뿐이었다.
이후 2011년에도 이대수 전 제주보훈청장이 재차 자료를 보냈지만 지금의 자료로는 더 이상의 재심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이어졌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문 선생의 행적은 당국의 무관심 속에 서서히 잊혀 가고 있다.
문형순 선생 외에도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비운의 독립운동가는 또 있다.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장제스, 윤봉길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항일투사 임도현(任道賢·1909∼1952) 선생은 수차례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의 후손들에 따르면 1931년 12월 일본 도쿄(東京) 인근의 다치카와(立川) 비행학교에 다니던 임 선생은 비행훈련을 받던 도중 동료 6명을 포섭,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탈출했다.
도쿄에서 출발해 제주도를 거쳐 상하이까지 1천800여㎞를 비행한 그는 상하이 인근 옥수수밭에 비상착륙, 이어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柳州)육군항공학교 등에서 차례로 수학한 뒤 중위로 임관해 쓰촨(四川)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를 보좌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 선생은 1934년 만주의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왼쪽 머리에 총을 맞는 큰 부상을 입었으나 상하이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임 선생의 어머니가 4·3사건 당시 소개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탈 때 조그만 장롱 속에서 겨우 건져낸 기록문건(자필 이력서)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카인 임정범(61)씨는 지난 2005년부터 백부인 임도현 선생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고군분투해왔지만 번번이 허사로 돌아갔다.
심지어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백부의 기록문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2009년 6월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임 선생의 묘소에서 제주대 법의학 교수팀과 언론사·도의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유해를 직접 확인, “두개골 좌측 측두골 부위에 0.5∼0.7㎝가량의 천공흔(구멍이 뚫린 흔적)이 관찰됐고 손상 형태로 미뤄 총상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법의학 박사의 소견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매번 국가보훈처로부터 ‘공적내용에 대한 활동 당시의 객관적인 입증자료 미비로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참다못한 임씨는 지난 4일 정부 세종청사 국가보훈처에서 1인 항의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내용과 정황이 명백함에도 후손들의 노력이 억지 주장처럼 비치는 것이 안타깝다”며 “조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한 백부님의 희생을 국가가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제주 출신 독립유공자는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인 강태선(92) 선생을 비롯해 모두 161명이다.
아직도 많은 애국지사가 행적 불분명 또는 증거 불충분 등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