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역사의 정원사/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입력 : ㅣ 수정 : 2019-03-1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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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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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봄이 온다. 싹이 움트기 시작한 나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체코 작가 차페크를 떠올렸다. 그는 정원사들의 일상을 빌려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불멸의 낙관주의를 노래했다. 정원사의 꿈을 노래한 것이다. 이 장미가 내년에 꽃을 피우면 얼마나 멋질까를 생각하고, 10년 정도 지나면 저 가문비나무의 묘목이 얼마나 무성할까를 기대하는 것. 차페크는 정원사의 이런 마음으로, ‘초록 숲 정원’이 인간의 희망이라 주장했다.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역사가 인간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구겨지고 초췌해진 역사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른바 인간이란 무엇이고 역사란 또 무엇일까. 인간의 특성에 관해서는 진즉부터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마는, 무엇보다도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나의 삶은 내 아버지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같은 논리로, 그것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삶이기도 하고, 내 아들의 삶, 아들의 아들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 어떤 의미로든 우리는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의 이러한 힘을 실감한 나머지,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구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치가들이 대표적이다. 때로 그들은 국가권력을 동원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다. 역사를 움켜쥐면 현실을 쉽게 장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도 현대의 일본 정부일 것이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명백한 역사 조작이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에서 제작된 30개가량의 동아시아 지도에는 울릉도 일대가 한국 영토로 정확히 표기돼 있다. 1920년대 중반에 간행된 일본지도에서조차 ‘동해’는 여전히 ‘조선해’(朝鮮海)라고 표기될 정도였다. 요컨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란 아예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 땅인 것이 명명백백하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 채 독도가 자국 소유라는 주장을 그치지 않는다.

큰 틀에서 보면, 역사 왜곡 문제가 독도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하필 일본이란 나라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국내에도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제주 4·3 사건’도 그러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도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에는 ‘촛불시민혁명’을 왜곡하거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한 당국의 노력조차 가차 없이 왜곡하는 정치세력이 횡행한다.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하지 못하면 이기적인 정치집단이 조작한 거짓 역사가 사회적 분위기를 지배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위력을 가진다. 경계할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오늘의 삶을 위해 부활시키고, 이미 일어난 사건을 기초로 역사를 만드는 힘. 그 힘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니체의 이러한 주장에 나는 십분 공감한다. 과거와 현재는 사물과 그 그림자에 해당한다. 표현을 달리하면, 그것은 곧 씨앗과 열매의 관계이기도 하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일이므로, 봄을 가꾸는 정원사의 일과 다를 바 없다.

차페크의 정원사에게는 겨울을 이기고 피어날 꽃과 나무가 미래의 희망이었다.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내일의 역사가 바로 희망이다. 아픈 기억이라도 외면하지 말자.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은, 과거를 멋대로 점령하려는 세력들이 꾸민 음모의 산등성이 너머에 여전히 한 줄기 빛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2019-03-1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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